다자키 쓰쿠루의 생명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북북


소설을 읽으며, 특히 문학 소설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감동하거나 기대하는 가능성에 판타지를 걸어 감동하기도 한다. 물론 이상적인 판타지적 사랑에 많은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이 소설을 느끼는 방법은 다양하디 다양하다.

이번 [쓰쿠루-순례의 해]를 읽으며 나의 경험과 빗대어 느끼는 식으로 독서감을 더했다.
나는 주인공인 쓰쿠루의 비해 색채도 자존감도 강한 나지만,고독한 면과 운명을 순응하고 체념하는(인간의 숨겨진 나약함) 그런 면을 많이 닮았다.
작품속 다자키의 냉정을 가져야만이 남겨진 친구들을 위하는 희생의 마음. 그 마음은 마치 [냉정과 열정사이]에 아오이와 쥰세이의 보이지 않는 듯 보이지 않는 붉은색 실선 같은 것이 아닐까? 
흔치 않은 희생과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꾸준한(끈질긴) 생명력이 다자키에게 보인다.

죽음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냈지만 결코 그는 죽음 앞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새로운 생명으로 돋아나기 위한 번데기 같은 과정을 사회나 다른 영향보다는 가장 친한 인간관계로부터 (과정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에게 새로운 생명력이란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고 어떤 의미로도 남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집 앞 그린필드(원당 점)에 저렴하고 먹어본 치킨 중에 가장 맛있는 가성비 최고인(가격 요인을 제외해도 최고) 핫스파이시 치킨에 목뼈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인 듯 하다. 그저 그에게 하나의 부수적인 여생이지 않았을까?

쓰쿠루는 36살이 되서야 21살에 잃었던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게 해준 '사라'에게 마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탈 당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사라의 존재는 생명력을 잃은 21~36살(15년) 시절의 생명력(삶의 이유)를 찾게 해준 매개체 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라는 그 15년의 생명력을 쥐락펴락 하고 있는 존재로 나타내어진다. 그녀는 21년을 복구(recovery) 함과 동시에 15년을 앗아갈(loss)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분명했다.
결국 쓰쿠루는 21년의 세월도, 15년의 세월(생명력)마저도 보존되지 못한 채로 소설이 종결 된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슴 아픈 현실이 진정 리얼리즘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일주일 만에 백만(1,000,000)부가 팔린 이 책은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실망감이 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스스로 사색을 하고 머리 속으로 초등학생이나 쓸 법한 독후감을 써내려가며 내가 쓸 법한 글을 쓰면서 [다자키쓰쿠루-순례의해]의 진정한 메세지를 느끼고 있다.
흥미롭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집중이 되는 마약 머금은 작품이지만 그에 담긴 메세지는 너무나도 깊었다.

하지만 이 책의 맹점은 '시로'가 죽었다는 소식이 언급 되었을 때부터 책(작품) 자체가 죽어간게 아닐까 싶다.
내가 느끼는 추락은 핀란드부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특히 핀란드에서 아카를 옹호하는 표현은 작품에 의미를 더 담기 위한 과도한 사족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그 마저도 좋았기 때문에 큰 불만과 상관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반하진 않았지만 쓰쿠루와 사라, 그 둘에 놓여진 문제를 사랑한다. 쓰쿠루와 사라의 열린 결말인듯 하지만 누구나 알법한 뻔한 결말로 인해 네이버 별평점을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열린 것 같다.

이글루스 가든 -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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